주요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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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적

  • 15
  • 칠곡 연화리유적 발굴품은 2014년에 인수되었으며, 이번 전시를 통해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출토된 복식류 중 철릭과 명정   회곽묘(灰槨墓)란 조선 초기에 시작되어 19세기까지 널리 사용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의 한 형태이다. 두꺼운 판재로 만든 목곽(木槨) 안에 시신을 안치한 목관(木棺)을 넣고, 목곽의 바깥 6면을 두껍게 석회를 덧씌워 밀봉하는 형태이다. 즉 목관, 목곽, 회곽의 3중 구조로 만들었다. 두꺼운 석회 때문에 내부는 외부의 공기와 완전히 차단되어 미생물이 활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내부는 매장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미라는 대부분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출토되었다. 회곽묘에서 출토된 명정(銘旌)은 장사(葬事) 지낼 때 죽은 사람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품계, 관직, 성씨 등을 적은 것이다. 칠곡 연화리유적 회곽묘에서 출토된 명정에는 “宣略將軍行訓練院判官昌寧張公之柩(선략장군행훈련원판관창녕장공지구)”가 기록돼 있다. 명정의 글자를 근거로 1936년 간행된 '漆谷誌(칠곡지)'와 창녕 장씨 족보를 통해 주인공을 밝혀낼 수 있었다. 묘주는 창녕 장씨 시조인 장일(張鎰)의 21세손인 장복길(張復吉)이었다. 장복길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을 지낸 인물로 1624년에 태어나 1685년에 62세로 사망하였다. 철릭은 상의와 하의를 따로 재단하여 허리에서 치마 주름을 잡아 연결시킨 포(袍)이다. (국립대구박물관은 2테마전시로 7월 28일부터 11월 22일까지 '2015 새로 맞이한 박물관 소장품, 칠곡 연화리 복식'을 개최한다)    

  • 14
  • 태조 4년(1395)에 昌山君 張寬에게내려진 원종공신록권(보물 726호) 조선 태조 4년(1395)에 전 봉익대부밀직부사(前 奉翊大夫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 창산군(昌山君) 장관(張寬)에게 사급(賜給)한 ‘개국원종공신록권’인데, 1981년 7월 15일에 보물 제 726호로 지정된 것이다. (길이 67.6m, 폭 3.4m)공신녹권이란 공신으로 인정하는 증서를 말하는데, 이것은 태조 4년(1395)에 창산군 장관(張寬)에게 내려진 원종공신 녹권이다. 태조는 태조즉위년(1392) 8월에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개국의 의거에 참여하고 공을 세운 신하는 개국공신에 봉하고 개국의거에는 참여치는 않았지만 태조를 따르고 신변을 도와주며, 왕위에 오르기까지 적극 밀어준 이들에게 원종공신에 봉하였다. 이 녹권은 원종공신 각 개인에게 발급된 유일한 문서로 붉은색 바탕에 길이 67.6m, 폭 34㎝ 정도의 크기이다. 내용은 공신의 공로사례를 열거하고 공신의 직명단자 등 그리고 본문머리를 비롯하여 9군데에 이조지인(吏曹之印)이 찍혀있다. 개국당시의 공신전기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녹권문서와 관제(官制) 및 이두문자 등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이다. 이 원종공신녹권은 조선 태조(太祖) 4년(1395)에 전봉익대부밀직사사상호군창산군장관(前奉翊大夫密直司事上護軍昌山君張寬)에게 사급(賜給)된 것이다. 태조는 건국(建國)한 다음 달인 원년(元年)(1392) 8월에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하고 개국(開國)의 계책(計策)과 의거(義擧)에 참여하여 공(功)을 세운 신하(臣下)들을 개국공신(開國功臣)에 봉(封)하고, 이어 원종공신을 포상(褒賞)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원종공신은 개국의거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잠저(潛邸)때부터 그를 따르며 도와주고 신변을 지켜주며 대위(大位)에 오르는 일을 적극 밀어준 공로가 있는 이들이다. 이 원종공신녹권은 길이 676cm, 폭(幅) 34cm의 홍색저지(紅色楮紙)에 쓴 것이다. 본문(本文)은 공신의 공로사례(功勞事例)를 열거(列擧)하고, 공신의 직명단자(職名單子), 특전(特典), 도감관여자(都監關與者)의 직함단자(職銜單子) 및 수결(手決)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본문 머리와 접지부분(接紙部分) 9군데에 '이조지인(吏曹之印)'이 찍혀 있다. 공신녹권은 공신 각 개인에게 발급(發給)되는 유일문서(唯一文書)로 개국 당시의 공신전기자료(功臣傳記資料)가 되며 또한 조선 초기의 녹권문서(錄券文書), 관제(官制) 및 이두(吏讀) 등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 13
  • 창녕군 부곡면 부곡촌 뒷산에 있으며, 9세(世) 휘 구성(九成)으로부터 15세 휘 자 홍(自洪)까지 7대 10위(배위 3위 포함)에 대한 상하 좌우의 산재(散在) 묘소가 임 진왜란으로 비석과 표석이 없어져서 위차(位次)를 알지 못하므로 이에 제단을 설 치하여 대대로 세일제(歲一祭)를 받들어 왔는데, 지난 1979년에 후손 눌암공 휘 두한(斗翰)이 비문을 지어서 세운 것이다. 창녕 부곡촌 뒷산에 있는 선조 제단비 (후손 訥庵公 斗翰 찬)

  • 12
  • 창녕군 고암면 괴산리 소재의 옛날 고강서원의 터에 세운 유허비(遺墟碑) 인데, 비문은 순재(醇齋) 김재화(金在華)가 지었고 글씨는 우인(于人) 조규철(曺圭喆)이 썼다. 고강서원 유허비 (창녕군 고암면 괴산리 소재) 고강서원 유허비 전면 (醇齋 金在華의 글, 于人 曺圭喆의 글씨)

  • 10
  • 창녕군 유어면 미구리(尾九里)에 있으며, 장령(掌令) 휘 우심(友心)과 주부(主簿) 휘 우진(友軫)을 위하여 세운 정자인데, 후손 병기(炳基), 병후(炳?) 등이 1963년에 건립한 것이며, 창녕인 후당(厚堂) 성순영(成純永)의 기문이 있다. 장령공, 주부공을 추모하여 건립한 감호재(현판: 克菴 李基允 書) 1963년에 건립한 감호재 전경 (창녕군 유어면 미구리 소재)

  •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元村里)의 서암(西巖)에 있으며, 처사 휘 재방(再房)과 처사 휘 재복(再復)을 위하여 후손 준호(駿昊)가 건립하였는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 하여 소실되자 후손 권표(權杓) 용표(龍杓) 등이 1976년에 중건하였다.

  • 8
  • 간암재(澗巖齋) 앞 동편에 있다. 팔효각 안에는 창녕장씨의 연 6세에 걸친 8효자 의 사적을 기록한 ‘하산장씨육세팔효기실비’(夏山張氏六世八孝紀實碑)가 있으며, 비문은 용인인(龍仁人) 현산(玄山) 이현규(李玄圭)가 지었다. 이 건물은 1949년에 세워진 것이다. 6세에 걸쳐 8효자가 행한 효행을 기념하여 1949년에 세운 효자각의 정문(不?門) 팔효각의 내부 팔효자의 효행사실을 적은 '하산장씨 6세 팔효 기실비'(玄山 李玄圭 찬)

  • 7
  • 창녕군 고암면 간적 마을 입구에 있으며, 암계공, 청계공 부자를 추모하여 설립한 것이다. 이 재실은 고강서원이 조령(朝令)으로 훼철되고 6년이 지난 1873년에 후 손 휘 명언(命彦)이 고강서원의 옛 재목(材木)을 모아서 건립한 것인데, 현재의 건 물은 1916년에 중건한 것이며,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의 중건기문(重建記文)이 있다. 암계공, 청계공 부자를 추모하여 건립한 간암재(1916년 중건) 간암재 전경 (창녕군 고암면 간적 마을 입구) 1916년 중건할 당시 내력을 적은 重建記(深齋 曺兢燮 찬)

  • 6
  • 창녕군 고암면 대암리 마을 입구에 있으며, 암계공(巖溪公) 휘 시행(是行), 청계공 (淸溪公) 휘 익정(翼禎) 부자의 정려각(旌閭閣)이다.본 정려각은 1706년에 세워진 후로 여러 번 중수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것인데,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중수기문(重修記文)이 있다. 암계공, 청계공 父子의 효행을 기린 정려각 양효각 전경(창녕군 고암면 대암리 소재)

  • 5
  • 창녕군 부곡면 부곡리의 선대 묘소 아래에 있으며, 선조를 추모하여 설립한 것이 다. 현재 건물은 1956년에 중건한 것이다. 창녕 부곡 선조묘소 아래에 건립한 부강재(창녕군 부곡면 부곡리 소재, 956년 중건)

  • 4
  • 창녕군 대지면 용소리의 시조 장간공 묘소 아래에 있으며, 장간공을 추모하여 건 립한 묘각(墓閣)이며, 온정당(溫正堂)이 있다. 본래 묘소 아래의 서편에 세워져 있 었는데, 1975년에 동편으로 이건(移建)하였다. 시조 장간공을 추모하여 건립한 용연재 용연재 전경(창녕군 대지면 용소리 소재) 1975년 이건할 당시 내력을 적은 移建記 (후손 訥庵公 斗翰 찬)

  • 3
  • 창녕군 고암면 괴산리(槐山里)에 소재하고 있으며, 숙종 39년(1713)에 창건되고, 순 조 6년(1806)에 도내 사림(士林)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호(陞號) 되었다. 본 서원은 효자로서 증도사(贈都事)가 된 김정철(金廷哲: 1591-1662), 효자로서 증도사(贈都 事)가 된 장시행(張是行: 1628-1688), 처사(處士)였던 손전(孫佺: 1634-1711), 효자로 서 증좌랑(贈佐郞)이 된 장익정(張翼禎: 1652-1697) 등, 4현(四賢)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향사(享祀)를 치러왔으나, 고종 5년(1868) 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한편 서원 훼철 당시 ‘고강서원’ 현판은 두 동강으로 파손되었으며, 현재 하단 부 1조각만 전해지고 있어서 그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파손된 ‘고강서원’의 현판 하단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파손된 ‘고강서원’의 현판 하단부 고강서원 유허비 전면 (醇齋 金在華의 글, 于人 曺圭喆의 글씨)

  • 순천 옥천교에 있었던 연자루는 1930년대 일제의 시가지계획으로 철거되었고, 1978년 재미교포 김계선의 기부로 현재 죽도봉공원에 복원.   연자루 : 장간공 장일(張鎰)霜月凄凉燕子樓 : 서릿발 같이 찬 달빛 처량한 연자루(燕子樓)에는郎官一去夢悠悠 : 낭관(郎官) 한번 간 후로 꿈만 유유하였네當時座客休嫌老 : 당시 좌객(座客)을 늙었다고 혐의하지 마소樓上佳人亦白頭 : 누각 위의 가인(佳人)도 역시 머리가 세었네 순천시 조곡동 죽도봉 공원에 복원한 연자루(현재)  

  • 1
  • 창녕군 대지면 용소리(龍沼里)의 헌진산(獻津山)에 계좌(癸坐)로 모셔져 있다. 묘 앞에 무인석(武人石)이 나란히 세워져 있고, 의성인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묘비명(墓碑銘)이 있는데 지난 1988년에 이 비문을 번역한 국역비(國譯碑)를 별도로 세웠다. 묘사일은 음력 10월 3일이다. 한편 용소리 동민들이 매년 정월 보름날 장간공의 묘소에서 동제(洞祭)를 지내는 풍습이 오래 전부터 전해지고 있다. 시조 장간공 묘소 전경  (창녕군 대지면 용소리 헌진산)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찬한 묘비명을 한글로 번역하여 세운 국역비 (1988년)   묘소 앞에 세워져 있는 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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