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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文科 급제자 1만4600명 분석한 宋俊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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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형근 작성일 19-10-14 13:05 조회 94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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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文科 급제자 1만4600명 분석한 宋俊浩 교수

 

급제자 신상 카드 10萬장

  최근 들어 韓·美 두 老학자가 30여 년 걸쳐 연구한 조선조 500년간의 지배 엘리트 연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름하여 「와그너-宋 文科榜目(문과방목) 프로젝트」. 에드워드 와그너 前 하버드大 교수와 宋俊浩(송준호) 전북대 명예교수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4600여 명의 인맥지도를 새로 만든 것이다.

 

  와그너-宋 프로젝트는 조선시대 관료 임용시험이었던 文科(문과), 그 전 단계 시험인 生員(생원), 進士(진사)시험 합격자는 물론, 이들의 명부에 등장하는 친인척 등 10만여 명에 대한 출생 연도, 사망연도, 친가·외가·처가 기록, 급제자의 字(자)와 號(호), 本貫(본관), 급제자를 비롯한 친인척의 최고 관직, 거주지를 각종 자료를 통해 찾아내 완벽한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 인명록을 완성한 것이다.

 

  두 학자의 연구결과는 내년 초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6권의 책으로 간행되며, 이 내용을 CD-ROM에 담는 작업은 한국의 동방미디어가 담당키로 했다.

 

  와그너-宋 두 교수가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를 탐색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은 1967년. 조선왕조가 수립된 직후인 1392년부터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까지 생원·진사시험 합격자는 4만649명, 문과 급제자는 1만4607명이다. 그런데 합격자의 신상정보가 기록된 司馬榜目(사마방목)에는 출신지와 거주지, 친인척 관계가 명확치 않은 것이 상당수에 달했다.

 

  두 교수는 문과 급제자 1만4600명을 대상으로 개개인의 신상카드를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작성된 카드가 10만여 매. 이 기초자료를 가지고 해당 집안의 족보와 문집, 실록, 邑誌(읍지) 등 관련자료를 총동원하여 일일이 확인작업을 진행했다.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양반들의 혼맥, 인맥구조를 통해 권력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34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宋교수는 『30여 년간 정식 연구비를 단 한번도 지원받지 못한 채 이 작업을 진행했다』고 말한다.

 

  조선사회 지배계층의 인맥지도를 완성하는 데는 동방미디어 李雄根(이웅근) 회장의 도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두 교수는 작업 초기에 연구 결과를 전산화하면서 컴퓨터상에서 漢字가 지원되지 않아 일일이 한자를 그려서 입력해야 했다. 李회장은 자신의 회사에서 개발한 한자입력시스템을 두 교수에게 지원해 방대한 전산화 작업이 손쉽게 해결됐다. 또 태평양을 넘나드는 두 교수의 연구 성과를 컴퓨터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30여 년에 걸친 두 老교수의 노력에 의해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들의 신상정보가 완성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일부 씨족이 독점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4607명 중 200명 이상 급제자를 배출한 씨족은 12개. 전주 李씨가 844명으로 으뜸을 차지했고, 다음이 안동 權씨(358명), 파평 尹씨(338명), 남양 洪씨(322명), 안동 金씨(309명), 청주 韓씨(275명), 밀양 朴씨(258명), 광산 金씨 253명, 연안 李씨(243명), 여흥 閔씨(234명) 순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특정 가문에서 대량의 급제자가 배출됐다는 점. 안동 金씨 金克孝(김극효)의 후손에서 130명, 반남 朴씨인 朴紹(박소)의 후손에서 129명, 대구 徐씨인 徐(서성)의 후손에서 120명, 풍산 洪씨인 洪麟祥(홍인상)의 후손에서 111명이나 문과 급제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선사회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다. 과연 조선을 지배했던 통치 엘리트들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토록 질긴 士農工商의 신분차별의 근원은 무엇이며, 혈연·지연·학연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전북 전주에 위치한 宋俊浩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보았다. 먼저 宋교수는 작업의 동반자였던 와그너 교수가 건강이 악화된 것을 아쉬워하며 그의 연구업적에 대한 소개로 말문을 열었다.

 

  『와그너 교수는 한 논문에서 「한국 사학계는 유명 학자가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면 실증적인 면에서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도 그대로 수용되어 定說化하는 경향이 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와그너 교수는 국내 학자들처럼 기존의 定說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확인과정을 거쳐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조선8道를 1000명의 관료가 통치

  ―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느냐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질문에 宋교수는 『조선시대 엘리트의 실체를 규명하기 전에, 그 시대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알아야 한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엘리트들은 민족이나 국가 개념보다 우선하는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衣冠之制(의관지제), 다른 말로 하면 禮(예)나 도덕, 혹은 聖賢之道(성현지도)지요. 우주 운행의 이치가 있듯이 사람의 세계에도 우주의 이치를 받들어 聖人이 마련한 이치가 있으니,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들의 행동규범이었습니다』

 

  이러한 성현지도를 앞서서 익히고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士大夫였다는 것이다.

 

  『조선이 망할 무렵 강화도에 외국 군함이 포탄을 퍼부을 때 올린 지식인들 상소를 보면 「임금께서 성현의 道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면 침략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이것은 「성현지도를 실천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그들 나름의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봐야죠』

 

 ―조만간 출간될 와그너-宋 프로젝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의 실체를 심층적으로 파악해 보자는 목적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지배 엘리트의 실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무엇입니까.

 

  『관리의 수가 놀라울 만큼 적다는 점입니다. 전라도와 제주도를 통치한 관리의 수가 100여 명에 불과할 정도였어요. 서울을 제외하면 조선 8도를 통치한 일선 관리의 숫자는 1000명이 채 안 됩니다. 소수의 관리들이 국가 살림을 이끌어 간 것이죠』

 

  ―조선시대에 배출된 문과 급제자는 1만4600여 명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을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엘리트로 규정해도 될까요?

 

  『그들이 전부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대표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보는 데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이 정도의 관리들만으로 국가 통치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 공백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지방의 명망가나 지역사회 엘리트들이 분담한 겁니다』

 

  ―조선시대에 지배 엘리트층에 속하려면 어떤 자격요건이 필요했을까요.

 

  『조선시대는 무엇보다 개인의 혈통을 우선했습니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가문 출신이라는 혈통의 고귀성이 최고의 가치였어요. 다음으로 개인의 학문적 성과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과거급제 여부, 관직을 어디까지 지냈느냐 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로 인정받으려면 혈통·학문·科擧·관직 등 네 가지 조건이 요구됐어요』

 

  ―조선시대의 엘리트 사회에서 혈통을 중시한 이유는?

 

  『우리 조상들은 통치기구에 참여하여 국가 지도자로 활동한 사람, 왕이나 왕조 치하에서 벼슬한 사람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孟子(맹자) 이전부터 이어온 중국의 전통적 관념이죠. 역사를 보면 어떤 왕조를 막론하고 폭력을 동원하여 왕조가 성립되면 왕권의 정통성 확립과, 그 존재를 신성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 과정에서 왕족이나 벼슬한 사람을 귀하게 보는 전통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귀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을 귀족, 양반이라 부르는 겁니다. 혈통이 귀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 姓을 쓰기 시작했고, 같은 姓씨들이 한 장소에 오래 살면서 씨족집단이 생겨났어요. 세월이 흘러 씨족집단의 수가 점차 늘자 本貫이란 것을 사용하여 다른 성씨와 차별화를 시도했고, 세월이 더 흐르면 같은 本貫 속에서도 어느 마을의 어떤 가문이냐를 가름하는 제2의 본관제도가 생겨난 겁니다』

 

 

  서울 거주 名門에 유리했던 과거제도

 

―결국 조선은 「한 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이라는 식의 엄격한 신분사회였다는 설명이 되겠는데요. 조선조 500년 동안 신분제도 타파를 위한 계급혁명이나 민중해방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조선은 신분질서가 너무 엄격했고, 그 모순도 컸기 때문에 10년, 아니 1년을 지탱하기 어려운 체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년이나 왕조가 유지된 이유는 그만큼 신분제도가 뿌리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요즘도 누구의 몇대 손이란 사실을 따지지 않습니까?』

 

  ―宋교수의 「과거제도를 통해서 본 중국과 한국」이라는 논문을 보니까 특정 씨족에서 문과 급제자가 대량 배출됐더군요. 특정 가문이 국가 요직을 독점한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중국에서는 과거 응시자를 지역적으로 안배하여 특정지역의 독점현상을 막았습니다. 이런 조치가 가능했던 이유는 황제 권한이 막강했기 때문이죠. 반면에 조선에서는 지역안배를 위한 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어요. 3년마다 한 차례씩 열리는 정기 과거(式年試)의 경우 지방에서 치르는 初試(초시)에는 지역안배가 고려됐습니다만, 임시로 치러지는 비정기 과거는 이것이 완전 무시된 채 서울 거주자를 대상으로 실시됐습니다. 때문에 서울, 혹은 서울 인근에 거주하는 세도 높은 가문이 유리했고, 응시 기회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특정 가문의 후예들이 대거 국가 요직에 등용된 이유라고 봐요』

 

  ―宋교수 논문을 보니까 조선시대에 시행된 과거에서 정기시험인 식년시 文科는 168회, 임시 특별시험인 비정기 文科는 581회, 정기와 비정기의 비율이 22대 78로 비정기가 월등 우세합니다. 반면 중국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정기시험만 원칙대로 시행됐습니다.

 

  『중국의 과거제는 3년마다 치러지는 정기시험이 전부였습니다만, 조선은 기회가 날 때마다 임시 과거가 시행됐어요. 특별 시험은 나라의 경사를 지식층과 함께 기뻐하자는 뜻에서 「慶科(경과)」라고 불렀고, 유생들을 위로한다는 페스티벌 성격이 강했어요. 그것은 王權이 집권 양반층에게 타협을 강요당했다는 증거입니다』

 

  ―과거제의 본질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널리 人材를 구해 관리로 등용시키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특정 지역, 특정 가문의 독점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과거가 100% 공정한 제도였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봅니다. 특정 가문, 특정 지역 독식 현상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강해집니다. 제도 자체가 경색화된 결과죠. 그러나 조선시대에 발표된 어떤 규정을 봐도 「양반이 아니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과거의 문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면 얼마든지 급제 기회는 주어진 셈입니다. 이것이 다른 봉건제 사회와는 달랐던 특징입니다』

 

   관리들은 실무능력에 어두웠다

 

    ―그렇지만 과거 준비를 위해서는 평균 20년의 수학기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오랜 기간 비생산적인 학문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경제적 富가 당락을 좌우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법률적 제약이 아닌, 현실적 제약으로 봐야죠. 조선시대의 과거에서 현실적 제약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의문 나는 것은 과거 급제 성적이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혈통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국가 요직에 등용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국가 요직일수록 혈통의 중요성은 최우선의 고려사항이었습니다. 科擧 성적이 요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았어요』

 

 ―조선시대에는 관직의 수에 비해 과거 급제자들이 너무 많아 과거에 급제하고도 보직을 받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는 주장도 있더군요. 그렇다면 선발 인원을 줄이거나 시험 횟수를 줄여 인사적체를 조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조선시대의 생원·진사시는 관직 등용과는 직접 관련이 없었고, 문과 급제자는 관직에 등용됐습니다. 조선 500년 동안 배출된 문과 급제자 총원은 1만4600여 명, 1년 평균 30명이 채 안됩니다. 이번 연구 과정에서 조사해 보니 문과에 급제하고도 관직을 받지 못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武科는 사정이 전혀 달랐어요. 조선시대 武科 급제자는 18만 명 정도 되는데, 이들은 급제하고도 관직에 오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科擧는 국가 통치를 담당하는 지도자, 관료를 등용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宋교수께서 발표한 「조선 후기의 과거제도」란 논문을 보면 「조선시대의 과거는 유교 경전과 중국 역사에 관한 지식 및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詩文(시문)의 창작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암송하는 능력이 뛰어난 선비들이 정치 실무나 實事求是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했을까요.

 

  『조선시대 관리들이 실무능력이 뛰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올바른 사고일 것입니다. 이 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조선시대로 사고의 틀을 전환해야 합니다. 당시 국가 지도부는 물론,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修身(수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의 길이 유교 경전에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면 세상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외에는 현실 돌아가는 것을 몰랐다고 봐야죠』

 

  ―조선의 지도자들이 유교 경전을 달달 외워서 국가가 부강해지고 자주독립을 실현하여 國利民福(국리민복)을 달성했다면 문제는 달랐겠지요. 그러나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유교밖에 몰랐다」고 해서 그 시대 지도자들이 역사의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 당시 우리는 너무 폐쇄적인 삶을 살았고,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전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처럼 온실 속에서 산 민족이 없어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안팎으로 200년은 너무나 평화가 난만해서 유교 경전을 암송하고, 그 가르침대로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겁니다』

 

   인간 차별이 심했던 사회

   

 ―요즘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 인사를 보면 地緣(지연)·學緣(학연)·血緣(혈연)에 크게 좌우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유산으로 봐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그중에서도 혈연이 가장 중요시됐어요』

 

  ―혈통이 중시된 사회는 다른 뜻으로 말하면 인간 차별이 대단히 심했다는 뜻 아닙니까.

 

  『조선시대처럼 인간 차별이 심했던 사회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조선과 동시대의 중국에서는 상인들도 科擧 응시는 물론, 저술활동도 활발히 하는 등 선비들보다 출세길이 빠른 사례가 많았습니다. 중국이 조선과 달리 개방사회로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끝없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사람이 죽고, 나라를 오랑캐에 빼앗기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교 경전만 가지고 세상일이 다 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 결과 중국은 서자 차별도 없고, 本貫 제도도 없앴고, 상인 천시 사고방식도 사라졌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외부 침략에 대응을 하다 보니 개방된 것이죠. 조선은 이런 역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때까지 오로지 유교 경전에 매달린 겁니다』

 

 ―이번 와그너-宋 프로젝트는 문과 급제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특징입니다. 武科 급제자를 연구 대상에서 제외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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